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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읽기

[김진호의 세계읽기]한미 FTA가 미국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틀렸다. 그 반대다

by gino's 2017. 7. 5.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백악관 캐비넷룸에서 열린 한·미 확대정상회담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 등의 얼굴이 보이지만, 백악관이 공개한 대담록에는 양국 각료들 중에서 한미 FTA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지적한 윌버 로스 상무장관과 개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회의 위원장의 발언만 담겼다. 워싱턴/연합뉴스



■돈과 돈이 부딪혀 흥정해내는 것이 협상의 정석 

‘돈’은 ‘돈’끼리 말하게 해야 한다. 돈이 말하는 트럼프 시대가 아니더라도 돈끼리 말을 하다가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다가도 셈을 따져 타협점을 흥정하는 게 개인 간이건, 국가 간이건 협상의 정석이다. 지난 달 30일 한·미 정상회담 안팎에서 일었던 미국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제안을 보고 든 생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30분 백악관 캐비넷룸에서 월버 로스 상무장관과 개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회의(NEC) 위원장을 대동하고 한·미 간 양자대화에 나와 한·미 FTA 재협상을 강하게 주문했다. 로스 장관과 콘 위원장이 집중적으로 제기한 문제는 철강과 자동차 교역이다. 특히 미국 자동차 산업을 과보호하려는 미국 역대 행정부와 같은 맥락에서 공정무역을 강조하며 ‘진짜 공정하고 평평한 운동장(a truly fair and level playing field)’을 거듭 강조했다. 

돈 문제를 중심으로 한·미 정상회담을 들여다 보려면 필연적으로 FTA를 거쳐야 한다. 철강과 자동차는 항목별로 세밀하게 들여다 볼 문제이다. 하지만 그전에 미국인들이 ‘협정문(text)을 재방문(revisit)한다’고 표현하는, 재협상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없다. 한·미 FTA가 체결된 2007년 봄 이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가 지난달 29일 백악관 남쪽 현관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탑승한 자동차가 도착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가 지난달 29일 백악관 남쪽 현관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탑승한 자동차가 도착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협상텍스트의 재방문(revisit), 재방문, 재방문… 

트럼프는 이미 지난 4월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한국과의 FTA는 힐러리 클린턴(당시 국무장관)이 만든 끔찍한 거래였다”면서 “한국과의 끔찍한 FTA를 재협상할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재검토 결과는 적어도 정상회담장에서 다소 생뚱맞게 제기됐다. 트럼프는 20조(실제론 19.8조)달러에 달하는 미국 국가부채의 원흉으로 무역역조를 지목, “국가부채는 매년 수입보다 지출을 늘려온 미국 재정정책 탓인데 그것이 무역역조와 무슨 상관이 있냐”는 AP통신의 핀잔을 들었다. 트럼프가 언급한 철강과 자동차 문제는 어찌보면 ’푼돈‘이다. 로스 장관은 “최근 교역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중국제 열연강관이 (한국에 수입돼) 다시 유정용파이프로 미국에 (우회)수출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측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제 강관을 사용한 것은 대미 수출철강 가운데 2%에 불과하다. 

미국 대통령과 상무장관이 모두 진지한 협상 준비가 안됐음을 내보인 꼴이다. 자동차 역시 큰 돈이 걸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한·미 FTA에 따라 미국의 대한 수출물량이 2만5000대가 넘으면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기준(2020년까지 ㎞ 당 97g 목표)배기가스 환경기준을 충족토록 규정하고 있다. 미국 기준은 2020년까지 113g으로 편차가 있다. 대등한 국가관계라면 실무협상을 통해 접점을 찾으면 될 일이다. 굳이 정상회담에서 정색을 하고 따질 만큼 큰돈이 걸린 사안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쯤해서 돌고 돌아 거쳐온 한·미 FTA의 여정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공동기자회견에서 발언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을 바라보며 박수를 치자, 트럼프 대통령이 답례를 하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공동기자회견에서 발언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을 바라보며 박수를 치자, 트럼프 대통령이 답례를 하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타결 5년 뒤 발효되고, 발효 5년만에 다시 고쳐야 하는 운명


트럼프 행정부의 거친 말을 체결 당시 미국 내 뜨거운 반응과 비교해보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2007년 4월 한·미 FTA 타결을 전후한 시점에는 찬사가 쏟아졌다. 카를로스 구티에레스 상무장관은 “15년간 미국이 체결한 무역협정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협정”이라고 했고, 수전 슈워브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한·미 관계의 중요한 이정표”라고 했다. 협정문이 ‘예술의 경지(state of art)‘라는 극찬도 나왔다(제프리 쇼트 PIIE 연구원).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8년 1월 마지막 국정연설에서 “미국이 지난 15년 간 체결한 FTA 가운데 상업적인 측면에서 가장 의미 있는 FTA”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연방의회 쪽에서는 “쇠고기 없으면 FTA 없다”는 험악한 말이 쏟아져나왔다. 

2008년 대선 주자로 나선 힐러리 클린턴이나 버락 오바마도 비난 일변도였다. FTA 비준 권한을 갖고 있는 의회는 환경과 노동 문제를 빌미로 딴지를 걸었다. 숱한 찬사와 비난이 뒤섞인 가운데 미국 조야의 요구는 상당부분 관철됐다. 2008년 쇠고기 협상을 타결했고 2010년 협정문 텍스트를 재방문하자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요구로 재협상이 벌어져 그해 말 추가협상이 타결됐다. 이후에도 우여곡절을 겪다가 2011년 10월에나 비준을 받았다. 그리고 발효된 게 2012년 3월15일이다. 그 협정문을 다시 열자는 게 트럼프의 주문이다. 타결 이후 5년이 지나 발효됐고, 발효된지 5년만에 다시 손보자는 것이다. 

재미 있는 한 컷이다. 지난달 29일 백악관 공식 만찬을 위해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트럼프 대통령 부부가 기념촬영에 나섰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이 각각 다른 쪽을 보고 있다. 김정숙 여사와 멜라니아의 시선도 각각 다르다. 워싱턴/연합뉴스

재미 있는 한 컷이다. 지난달 29일 백악관 공식 만찬을 위해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트럼프 대통령 부부가 기념촬영에 나섰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이 각각 다른 쪽을 보고 있다. 김정숙 여사와 멜라니아의 시선도 각각 다르다. 워싱턴/연합뉴스 


■미국 자동차산업 과보호에 희생양이 된 한·미 FTA 

트럼프 행정부가 이번에 문제제기 한 철강·자동차 항목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 입장에선 차떼고 포떼는 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없다. 한국이 2006년 1월 대미 FTA를 추진할 무렵 가장 혜택이 클 업종으로 꼽혔던 것이 자동차와 고급섬유제품이었다. 특히 자동차는 수차례 재협상을 통해 상당부분 우리가 얻을 것을 내놓았다. 자국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 현 협정문이지만 지난해 우리가 96만대를 판 반면에 6만여대를 수입해 대미흑자의 효자역할을 했다. 한국 자동차의 경쟁력이 이미 미국 자동차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승자의 아량’을 보여주는 것이 지속가능한 교역조건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돈과 돈이 걸린 협상에선 있을 수없는 일이다. 미국 행정부가 부시→오바마→트럼프에 이르기까지 또, 의회 다수당이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미국의 요구에 따라 계속 텍스트를 다시 열어야 한다면 대체 FTA를 왜 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트럼프 발언의 거품을 걷어내면 재협상(revisit)가 아니고, 개정(revise)협상이다. 타결한 지 10년이 지난 만큼 미국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업데이트 할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재협상이건, 개정협상이건 언제든지 미국의 요구에 따라 다시 손을 봐야할 운명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없다.

한·미 FTA 비준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열린 2011년 11월 6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가면을 쓴 한 참가자가 피킷시위를 벌이고 있다. 5년 뒤 미국 대선에서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다.      박민규기자

한·미 FTA 비준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열린 2011년 11월 6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가면을 쓴 한 참가자가 피킷시위를 벌이고 있다. 5년 뒤 미국 대선에서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다. 박민규기자



■경제적으론 미국쪽에, 비경제적으론 한국쪽에 ‘기울어진 운동장’ 
한·미 FTA는 단순한 경제논리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적인 동기는 크지 않았다. 교역관행을 선진화한다거나 하는 부수적 이익이 있겠지만 FTA없어서 대미 교역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참여정부가 협상 전에 스크린쿼타와 쇠고기 시장을 열어준 것은 양국관계를 단순한 군사동맹에서 경제동맹으로 확대하자는 비경제적 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한·미는 그 덕에 운명공동체가 됐을까. 한국 입장에선 자본주의의 원칙 보다 더 큰 제한이 있다. 미국의 비경제적인 절대우위 때문이다. 

유사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주고 국토방위의 마지막 책임과 권한을 미국에 아웃소싱하고 있는 한, 통상문제에서 미국의 요구를 마냥 외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점에서 트럼프의 말대로 FTA가 수출입 실적면에서 미국쪽으로 기운 운동장일지 모르지만, 한·미 관계는 본질적으로 한국쪽으로 기운 운동장이다. 돈문제를 돈끼리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도록 맡길 수없는 것이 한·미관계의 본질이다. 안보적으로는 북한의 비대칭전력에, 경제적으론 미국에 인질로 잡혀 있는 이중의 딜레마인 것이다. 

쇼트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PIEE) 연구원이 트럼프의 재협상론이 불거진 지난 3월 지적한대로 “한반도의 긴장상황을 고려할 때 미국과 한국 어떤 나라도 전략동맹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교역마찰을 원치 않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에 발목이 잡힌 한·미 FTA는 우리에겐 비경제적 성격이 짙고, 미국에겐 경제적 타산이 짙다. 그 기울어진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그때까지 돈과 돈이 테이블에서 맘껏 자웅을 겨루는 ‘협상의 정석’은 잊어야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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