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과 수표교
어린 시절 서울 현저동의 독립문을 처음 본 감격은 오래 남는다.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또 달랐다. 거대한 석문(石門)의 인상은 철들어 지구 반대편 파리 개선문의 웅장함을 목도하고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 독립문이 박제된 문화재로 바뀐 것은 “싸우면서 건설하자”던 유신 말기 도시공학자들의 탓이다. 위치 자체의 역사성을 배려한답시고 직선으로 건설했어야 할 바로 옆 성산고가도로를 S자로 건설한 뒤, 결국 북서쪽으로 70m 옮겼다. 신문로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興化門)은 또 어떤가. 돌고돌다가 결국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 사례다. 일제가 1910년 경성중학(서울고등학교)을 지으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장충동 박문사 정문이 되더니, 해방 뒤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였다. 그나마 1988년 경희궁 근처로 이사왔지만..
칼럼/여적
2012. 2. 28. 21:53